해당과정 — 산소 없이도 시작되는 포도당 분해의 첫 단계
송준호(송쌤)송쌤생명과학입시연구소 대표
1897년 독일의 화학자 한스 부흐너(Hans Buchner)와 에두아르트 부흐너(Eduard Buchner) 형제는 원래 효모 추출액을 의약품 보존용으로 쓰려고 설탕을 방부제 삼아 섞었습니다. 그런데 이 죽은 효모 세포에서 짜낸 추출액이 설탕을 알코올로 발효시키는 걸 보고 다들 깜짝 놀랐어요. 당시 학계는 발효가 "살아있는 세포만이 할 수 있는 생명력의 작용"이라고 믿고 있었거든요(루이 파스퇴르도 이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부흐너의 실험은 세포 안의 효소들만 있으면 살아있는 세포 없이도 당을 분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이 발견으로 에두아르트 부흐너는 1907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여기서 밝혀낸 반응 경로가 바로 오늘 다룰 해당과정입니다.
해당과정이란 — 아주 오래되고, 거의 모든 생물이 갖고 있는 경로
해당과정(glycolysis)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당(glykys)을 쪼갠다(lysis)'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탄소 6개짜리 포도당 한 분자를 탄소 3개짜리 피루브산(pyruvate) 두 분자로 쪼개는 10단계짜리 효소 반응 경로예요. 세포질(cytosol)에서 일어나고, 반응 어느 단계에서도 산소를 직접 쓰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건 해당과정이 세균부터 식물, 동물, 균류까지 생물계 거의 전 영역에서 거의 똑같은 형태로 보존돼 있다는 점이에요. 지금으로부터 약 27억 년 전 대기 중 산소 농도가 크게 오르기 전(이른바 대산화 사건 이전)에도 지구엔 이미 생명이 있었는데, 그 시절 생물들에게는 산소를 쓰지 않는 이 경로가 사실상 유일한 에너지 획득 수단이었을 거라고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해당과정은 세포호흡의 '첫 단계'라기보다는, 진화적으로 훨씬 나중에 등장한 산소 기반 대사(피루브산 산화, 시트르산 회로, 산화적 인산화)가 이 오래된 경로 뒤에 덧붙여진 형태에 가깝습니다.
두 단계로 나눠 보기 — 투자하고, 회수한다
10단계나 되는 반응을 하나하나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크게 두 국면으로 나눠서 이해하면 훨씬 명확해져요.
- 에너지 투자 단계(energy investment phase) — 포도당에 인산기를 두 번 붙이는 데 ATP 2분자를 씁니다. 이렇게 인산기가 붙어 불안정해진 6탄당은 결국 탄소 3개짜리 글리세르알데하이드-3-인산(G3P) 두 분자로 쪼개져요.
- 에너지 회수 단계(energy payoff phase) — G3P 두 분자가 각각 산화되면서(이때 NAD⁺가 NADH로 환원됩니다) 효소가 인산기를 직접 ADP에 옮겨 붙이는 방식으로 ATP를 총 4분자 만듭니다. 이 두 분자의 최종 산물이 피루브산이에요.

송쌤생명과학 자체 제작
투자 단계에서 ATP 2개를 쓰고, 회수 단계에서 ATP 4개를 버니, 포도당 한 분자당 순생산은 ATP 2개입니다. 여기에 회수 단계에서 만들어진 NADH 2개와 최종 산물인 피루브산 2분자가 해당과정의 전체 성적표예요.
기질수준 인산화 — 개념 6.3에서 이미 본 그 반응
회수 단계에서 ATP가 만들어지는 방식을 기질수준 인산화(substrate-level phosphorylation)라고 부릅니다. 효소가 인산기를 붙인 기질 분자에서 그 인산기를 떼어 곧바로 ADP에 옮겨 붙이는, 상당히 직접적인 반응이에요(ATP의 구조와 인산기 전달 자체는 개념 6.3에서 이미 다뤘죠). 뒤에 나올 산화적 인산화(개념 10.4)가 전자전달계·화학삼투라는 훨씬 복잡한 장치를 거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기질수준 인산화는 효소 하나가 반응 하나로 끝내는 훨씬 단순하고 빠른 방식입니다. 다만 그만큼 만들어지는 ATP 양도 적어요 — 이 차이가 왜 세포호흡 전체 ATP 생산량의 대부분이 산화적 인산화 쪽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이 2 ATP만으로 충분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포도당 한 분자가 완전히 산화될 때 나오는 자유에너지에 비하면, 해당과정에서 회수하는 ATP 2개는 극히 일부예요. 나머지 에너지 대부분은 아직 피루브산과 NADH 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산소가 있는 환경이라면 피루브산은 미토콘드리아로 들어가 피루브산 산화와 시트르산 회로(개념 10.3)를 거치며 훨씬 많은 전자를 추가로 뽑아내고, 그 전자들이 결국 산화적 인산화(개념 10.4)에서 ATP 대량 생산으로 이어집니다 — 지난 글(개념 10.1)에서 본 네 단계 전체 그림을 다시 떠올려 보면 딱 맞아떨어질 거예요.
그럼 산소가 없을 때는 어떻게 될까요? 해당과정 자체는 산소 없이도 계속 돌아갈 수 있지만, 사실 여기엔 숨은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 회수 단계가 계속 진행되려면 NAD⁺가 끊임없이 공급돼야 하는데, 산소가 없으면 전자전달계가 멈추면서 NADH가 다시 NAD⁺로 산화될 통로가 막혀 버립니다. NAD⁺ 재고가 바닥나면 해당과정 자체가 멈춰요. 이 문제를 세포가 어떻게 우회하는지가 바로 발효(개념 10.5)의 핵심 아이디어입니다.
쌤 한마디 — 부흐너 형제의 발견은 원래 목적(설탕을 방부제로 쓰기)과는 전혀 다른 데서 나온 우연한 관찰이었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과학사에는 이렇게 "의도한 실험이 아니었는데 그 과정에서 더 중요한 걸 발견한" 사례가 꽤 많은데, 페니실린 발견도 비슷한 계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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