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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행동과 배우는 행동 — 그 사이의 넓은 회색지대

송준호(송쌤)송쌤생명과학입시연구소 대표

"본능이에요, 학습이에요?" 행동 단원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함정이 하나 숨어 있어요. 둘 중 하나여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흰관참새 수컷은 자기 종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는 타고난 걸까요, 배운 걸까요. 답부터 말씀드리면 타고난 틀 위에 배운 내용이 채워진 것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몰 수 없어요. 그리고 자연에서 흥미로운 행동은 대부분 이 회색지대에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학습의 종류를 먼저 정리하고, 그다음 그 이분법이 왜 낡았는지를 보겠습니다.

선천적 행동이 뜻하는 것

선천적 행동(innate behavior)은 "환경과 무관한 행동"이 아닙니다. 정확한 뜻은 그 종의 개체라면 경험의 차이와 상관없이 거의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행동이에요. 발생 과정이 워낙 강하게 규정되어 있어서 환경이 웬만큼 달라져도 결과가 비슷하게 나온다는 뜻입니다.

앞 글에서 본 고정행동양식과 주성이 대표적이죠. 큰가시고기 수컷은 다른 수컷의 공격을 구경한 적이 없어도 붉은 배를 보면 달려듭니다. 거미는 거미줄 짜는 법을 배운 적이 없고, 첫 번째 줄부터 제 종의 형태로 짭니다.

선천적 행동이 유리한 상황은 분명합니다.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일 때, 그리고 같은 상황이 세대마다 거의 똑같이 반복될 때예요. 포식자를 만났을 때 도망치는 법을 시행착오로 배울 수는 없으니까요.

학습 ① 습관화 — "무시해도 되는 것"을 배우기

습관화(habituation)는 가장 단순한 학습입니다. 반복해서 들어오지만 아무 결과도 따라오지 않는 자극에 대해 반응을 점점 줄여가는 것이에요.

새는 처음 보는 허수아비에 놀라 달아나지만, 며칠이 지나면 그 위에 앉습니다. 바람 소리, 지나가는 그림자 하나하나에 다 반응하면 정작 중요한 신호에 쓸 에너지가 남지 않아요. 그래서 습관화를 이렇게 정의해 두면 좋습니다. "무엇에 반응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무시해도 되는지"를 배우는 학습.

주의할 점은 습관화가 감각의 피로나 근육의 지침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른 자극을 주면 반응이 다시 정상으로 나오니까요. 감각기가 망가진 게 아니라 중추에서 그 자극의 값을 낮춘 것입니다.

학습 ② 연합학습 — "무엇과 무엇이 함께 온다"를 배우기

연합학습(associative learning)은 서로 떨어져 있던 두 가지를 연결하는 학습입니다.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느냐에 따라 둘로 나뉩니다.

구분무엇을 연결하는가사례
고전적 조건화자극과 자극종소리와 먹이를 함께 겪은 개가 종소리만으로 침을 흘림
조작적 조건화(시행착오)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지렛대를 누르니 먹이가 나오는 경험을 한 동물이 지렛대를 계속 누름

고전적 조건화에서 동물은 가만히 있어도 됩니다. 두 자극이 잇따라 오는 것을 겪기만 하면 연결이 생겨요. 반면 시행착오 학습이라고도 부르는 조작적 조건화에서는 동물이 먼저 무언가를 해봐야 합니다. 해보고, 결과가 좋으면 그 행동이 늘고 나쁘면 줄어들죠.

자연에서의 예가 교과서 예보다 이해가 빠릅니다. 밝은 무늬의 독 있는 곤충을 한 번 삼켜 본 어린 새는 다음부터 그 무늬를 피합니다. 무늬라는 자극과 불쾌한 결과가 연결된 거예요. 경고색이 작동하려면 이 학습 능력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포식자가 배우지 못한다면 눈에 띄는 색은 그냥 자살행위일 테니까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동물은 아무 두 가지나 똑같이 잘 연결하지 못합니다. 맛과 복통은 몇 시간 간격이 있어도 쉽게 연결하지만, 소리와 복통은 잘 연결하지 못해요. 무엇을 잘 연결하는지에도 종마다 타고난 편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학습 능력 자체가 진화의 산물이라는 첫 번째 단서죠.

학습 ③ 공간학습과 인지지도 —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배우기

공간학습(spatial learning)은 환경의 공간 구조를 기억하는 학습입니다. 틴버겐이 나나니벌로 한 관찰이 고전입니다. 이 벌은 굴 주변의 물체 배치를 기억해 굴을 찾아오는데, 벌이 나간 사이에 굴 둘레의 표지물을 통째로 옆으로 옮겨 두면 벌은 옮겨진 표지 쪽으로 돌아옵니다. 굴 자체를 기억한 게 아니라 주변 지형지물과의 관계를 기억한 겁니다.

여기서 더 유연한 형태가 인지지도(cognitive map)입니다. 여러 지표 사이의 관계를 내부에 표상해 두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경로로도 목표에 도달하는 능력이에요. 먹이를 여러 곳에 숨겨 두고 나중에 찾아 먹는 새들이 이 능력을 잘 보여줍니다.

학습 ④ 통찰 — "해본 적 없는 답"을 만들기

통찰학습(insight learning)은 시행착오 없이, 눈앞의 요소들을 머릿속에서 재배열해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쾰러가 침팬지에게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바나나를 매달아 둔 실험이 대표적이에요. 침팬지는 한참 주변을 살피다가 흩어져 있던 상자를 끌어와 쌓고 올라섰습니다. 상자 쌓기를 반복해서 보상받은 적이 없는데도요.

까마귀류도 비슷한 문제 해결 능력을 보입니다. 나뭇가지나 철사를 구부려 구멍 속의 먹이를 꺼내는 행동이 잘 알려져 있죠.

여기에 사회적 학습(social learning)을 덧붙이면 학습의 지도가 완성됩니다. 직접 겪지 않고 다른 개체를 관찰해서 배우는 것이에요. 어린 버빗원숭이는 처음에는 하늘을 나는 온갖 것에 독수리 경계음을 냅니다. 그러다 어른이 언제 그 소리를 내는지 보면서 점점 정확해져요. 이렇게 학습된 행동이 세대를 넘어 전해지면 그것이 문화 전달입니다.

정리 — 학습의 다섯 유형을 한 표로

유형무엇을 연결·획득하는가핵심 질문
습관화자극 ↔ "결과 없음"무엇을 무시해도 되는가
고전적 조건화자극 ↔ 자극무엇 다음에 무엇이 오는가
조작적 조건화(시행착오)행동 ↔ 결과내가 무엇을 하면 좋아지는가
공간학습·인지지도장소 ↔ 지형지물의 관계어디에 무엇이 있는가
통찰학습기존 요소 ↔ 새 조합해본 적 없는 답을 만들 수 있는가

이름만 외우면 헷갈리지만, "무엇과 무엇을 잇는 학습인가"로 물으면 거의 안 틀립니다. 사회적 학습은 이 다섯과 나란한 항목이라기보다, 위 학습들이 남을 통해 일어나는 경로라고 보면 깔끔합니다.

이분법이 낡은 이유 — 새의 노래 학습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흰관참새의 노래는 이 단원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예요. 관찰된 내용을 순서대로 보겠습니다.

  • 어린 수컷이 민감기 동안 같은 종 어른의 노래를 들으면, 한참 뒤 번식기에 그 노래를 제대로 부릅니다.
  • 민감기에 아무 노래도 듣지 못하면 비정상적인 노래를 부릅니다. 완전한 무음은 아니고, 어딘가 어설픈 노래를 부르죠.
  • 민감기에 다른 종의 노래를 들려줘도, 그것을 따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 배우는 시기와 실제로 부르는 시기 사이에 시간 간격이 있습니다. 듣고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어설픈 소리부터 내며 자기 소리를 기억과 맞춰 다듬어 완성합니다.

이 네 가지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소리를 노래로 받아들일지"는 타고났고, "정확히 어떤 노래를 부를지"는 배웠습니다. 타고난 틀(주형)이 후보를 걸러 주고, 그 안에서 경험이 내용을 채운 거예요. 그래서 이 행동을 본능이라고만 해도 틀리고 학습이라고만 해도 틀립니다.

각인도 같은 구조입니다. 갓 부화한 회색기러기가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을 따라다닌 로렌츠의 관찰에서, "따라다닌다"는 행동과 "지금이 그 시기다"라는 민감기는 타고났고, 대상이 누구인지는 경험이 정합니다. 자연에서는 그 시기에 눈앞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상이 어미이므로, 이 허술해 보이는 규칙이 거의 언제나 정답을 냅니다.

거미줄 짓기에서 침팬지의 상자 쌓기까지를 본능–학습 한 축 위에 놓아 대부분의 행동이 그 사이 회색지대에 있음을 보이고, 학습 다섯 유형을 '무엇과 무엇을 잇는가'로 세운 표, 민감기라는 창이 열려 있는 동안에만 각인이 새겨지는 시간축, 그리고 타고난 틀 위에 경험이 내용을 채우는 새의 노래 학습 네 단계

본능과 학습은 서랍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축이다 — 송쌤생명과학 자체 제작

그럼 무엇이 무엇을 정하는가

그래서 요즘은 "본능 대 학습"이라는 질문 대신 이렇게 묻습니다. 이 행동에서 타고난 부분은 어디까지이고, 경험이 채우는 부분은 어디부터인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왜 이 종은 하필 이런 식으로 나눠 놓았는가를 묻게 되죠. 이게 궁극 원인의 질문입니다.

대략의 규칙은 이렇습니다.

  • 환경이 세대마다 일정하고 실수 비용이 크면 → 타고난 쪽이 유리합니다.
  • 환경이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고, 수정할 기회가 있으면 → 배우는 쪽이 유리합니다.
  • 학습에는 시간과 위험이라는 비용이 듭니다. 배우는 동안은 서툴고, 그 서투름이 잡아먹힐 확률을 높이니까요.

학습 능력 자체가 자연선택을 받은 형질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배우는가, 무엇을 잘 배우는가, 언제 배우는가 — 이 모두가 그 종이 살아온 환경에 맞춰 다듬어진 결과예요.

쌤 한마디 — 생기부 탐구에서 행동을 다루겠다는 학생에게 저는 늘 같은 조언을 합니다. "본능인지 학습인지 알아보겠다"로 주제를 잡으면 거의 실패해요. 결론이 "둘 다입니다"로 끝나서 밋밋해집니다. 대신 어디까지 타고났고 어디부터 배우는지 경계를 찾아보겠다로 바꿔 보세요. 흰관참새 연구가 딱 그 질문에 답한 설계입니다. 무엇을 막으면(노래를 안 들려주면) 무엇이 무너지는지 — 경계를 찾는 실험은 늘 "무언가를 빼보는" 설계에서 나옵니다.

정리하면

학습은 다섯 갈래로 정리됩니다. 무시해도 되는 것을 배우는 습관화, 자극끼리 잇는 고전적 조건화, 행동과 결과를 잇는 시행착오, 공간 관계를 잇는 공간학습과 인지지도, 그리고 기존 요소를 새로 조합하는 통찰학습. 여기에 남을 통해 배우는 사회적 학습이 얹힙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학습은 빈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잘 연결하는지, 언제 잘 배우는지에 이미 타고난 편향이 깔려 있어요. 새의 노래 학습과 각인이 그 회색지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행동들이 실제로 먹이 찾기·짝짓기·이타행동에서 어떻게 선택을 받는지 보겠습니다. 이 단원의 두 질문 틀을 다시 확인하려면 첫 글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틀린 내용이나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문의하기로 알려 주세요. 확인한 뒤 고치고, 고친 날짜를 위에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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