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기원 — 실험이 보인 것과 아직 가설인 것
송준호(송쌤)송쌤생명과학입시연구소 대표
자연선택은 이미 번식하고 있는 집단에 작용합니다. 변이가 있고, 그 변이가 자손에게 전달되고, 그중 일부가 더 많이 남는 것. 이 논리가 굴러가려면 이미 복제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남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복제하는 것 자체는 어떻게 생겼는가. 이건 진화론이 답하는 질문이 아니라 진화론이 시작되기 직전의 질문입니다. Ch.24까지가 종이 갈라지는 과정을 다뤘다면, Ch.25 대진화는 그보다 훨씬 큰 시간 축 위에서 이 질문부터 시작합니다.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답을 드리는 글이 아닙니다. 대신 어디까지가 실험으로 확인된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아직 가설인지 그 선을 분명하게 그어 드리겠습니다. 이 단원에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헷갈리는 게 정확히 그 선이거든요.
초기 지구는 어떤 곳이었나
지구는 약 45억 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 뒤 수억 년 동안은 소행성 충돌이 잦았고 지표가 굳을 틈이 없었어요. 화석으로 남은 가장 오래된 생명의 흔적은 약 35억 년 전 스트로마톨라이트입니다. 층층이 쌓인 미생물 군집이 굳은 암석이에요. 화학적 흔적까지 포함하면 조금 더 올라가기도 하는데, 해석이 갈려서 값을 하나로 못 박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생명이 생긴 시점은 지구가 식은 뒤부터 35억 년 전 사이 어딘가입니다. 수억 년짜리 창문이죠. 그 창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복원하려는 것이 이 단원의 첫 시도입니다.
이 과정은 보통 네 단계로 나눠 생각합니다. 각 단계마다 확인된 정도가 다르니, 이 순서를 머릿속에 먼저 세워 두세요.
- ① 작은 유기 분자의 무생물적 합성 — 아미노산, 뉴클레오타이드 같은 단량체
- ② 그 단량체가 이어진 거대분자 — 폴리펩타이드, 핵산
- ③ 막에 싸인 원시세포 — 안과 밖이 나뉜 작은 방울
- ④ 자기 복제하는 분자 — 유전이 시작되는 지점
밀러-유리 실험이 실제로 보인 것
1953년 스탠리 밀러와 해럴드 유리는 유리 장치 안에 물을 넣고 끓인 뒤, 당시 초기 대기로 추정하던 기체(메테인·암모니아·수소·수증기)를 채우고 방전으로 번개를 흉내 냈습니다. 며칠 뒤 장치 안에서 아미노산이 나왔습니다. 나중에 남아 있던 시료를 더 정밀한 방법으로 다시 분석했더니 처음 보고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아미노산이 검출됐어요.
여기서 가장 흔한 오해를 짚습니다. 이 실험은 생명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세포도, 자기 복제도, 대사도 없었어요. 플라스크 안에 생긴 것은 유기 분자의 혼합물입니다.
그럼 이 실험이 보인 것은 무엇일까요. 딱 하나입니다. 생명체 없이도, 무기물과 에너지만으로 생명의 재료가 되는 유기 분자가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것. 당시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결론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유기물은 생명체 안에서만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남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이 실험에는 약점도 있습니다. 밀러와 유리가 넣은 기체 조성이 실제 초기 대기와 달랐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은 초기 대기가 그렇게 강한 환원성은 아니었고, 화산에서 나오는 이산화 탄소·질소·수증기가 주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요. 그래서 후속 연구들은 다른 조건을 시험했고, 심해 열수분출공 주변처럼 뜨거운 물과 광물과 화학적 기울기가 함께 있는 환경이 유력한 후보로 꼽힙니다. 운석에서 아미노산이 검출된 사례도 있어서, 일부는 우주에서 왔을 가능성도 열려 있고요.
중요한 건 이겁니다. 대기 조성 논쟁이 있어도 ①단계 자체는 여러 조건에서 반복 재현됐습니다. 조건이 바뀌어도 유기 단량체는 만들어져요. 여기까지는 실험입니다.
②단계 — 이어 붙이기가 왜 어려운가
단량체가 있다고 거대분자가 저절로 생기지는 않습니다. 아미노산을 잇는 것도, 뉴클레오타이드를 잇는 것도 탈수 축합이에요. 물 분자가 빠지면서 결합이 생깁니다. 그런데 물이 가득한 바다에서는 이 반응이 잘 안 일어나요. 오히려 반대 방향, 즉 물이 끼어들어 끊는 가수분해가 유리합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이 주목한 것이 표면과 건조입니다. 실험실에서는 단량체 용액을 뜨거운 모래나 점토, 암석 조각에 떨어뜨려 물을 날리면 짧은 중합체가 만들어집니다. 특정 점토 광물의 표면은 뉴클레오타이드를 붙들어 늘어놓아 중합을 돕는다는 결과도 있어요. 파도가 치는 갯바위처럼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하는 자리가 후보로 거론되는 이유입니다.
다만 여기서 나오는 중합체는 짧고, 서열이 무작위입니다. 기능하는 효소나 유전자 길이의 분자가 이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아직 없어요. ②단계는 원리는 보였지만 규모는 못 보인 상태입니다.
③단계 — 원시세포는 실제로 만들어집니다
의외로 이 단계가 실험적으로는 꽤 앞서 있습니다. 원시세포(protocell)는 막으로 둘러싸여 안과 밖이 구분된 작은 방울을 말해요.
왜 막이 결정적일까요. 막이 생기는 순간 내부 조성이 바깥과 달라질 수 있고,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 흩어지지 않고 모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선택이 작용하려면 "개체"라는 단위가 있어야 하는데, 막이 그 단위를 만들어 줍니다.
실험실에서 확인된 것들은 이렇습니다. 지방산 같은 양친매성 분자를 물에 넣으면 저절로 이중층 방울이 만들어집니다. 이 방울은 물과 작은 분자는 통과시키고 큰 분자는 가둡니다. 재료를 더 넣으면 커지다가 물리적인 힘으로 둘로 갈라지기도 하고요. 심지어 안에 RNA 조각을 넣은 방울이 바깥에서 뉴클레오타이드를 받아들여 사슬을 늘린 사례도 보고됐습니다.
그러니 ③단계는 이렇게 정리하세요. 막에 싸인 방울이 스스로 만들어지고, 자라고, 갈라지는 것까지는 실험입니다. 그 방울이 스스로를 정확히 복제하며 대를 잇는 것은 아직 아니고요.
④단계 — RNA 세계 가설
가장 어려운 단계입니다. 지금 세포에서 유전정보는 DNA에 있고, 그걸 읽고 복제하는 일은 단백질 효소가 합니다. 그런데 DNA는 단백질 없이는 복제되지 않고, 단백질은 DNA 정보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아요. 둘 중 무엇이 먼저였는가 — 이것이 닭과 달걀 문제입니다.
이 교착을 푼 발견이 리보자임(ribozyme)입니다. 일부 RNA 분자가 효소처럼 화학 반응을 촉매한다는 사실이 1980년대에 밝혀졌고, 이 발견에는 노벨 화학상이 주어졌습니다. 더 결정적인 건 리보솜이에요. 펩타이드 결합을 실제로 맺어 주는 자리가 단백질이 아니라 rRNA라는 것이 구조 연구로 확인됐습니다. 지금 세포 안에도 RNA가 촉매로 일하는 흔적이 남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RNA 세계 가설입니다. DNA도 단백질도 없던 시기에 RNA가 정보 저장과 촉매를 겸했다는 시나리오예요. RNA라면 닭과 달걀이 한 분자 안에 들어갑니다.
일단 자기 복제하는 RNA가 생기면 그다음부터는 진화입니다. 복제는 완벽하지 않으니 복제 오류가 쌓여 변이가 생기고, 더 빠르고 정확하게 복제되는 서열이 재료를 더 많이 차지합니다. 실제로 시험관 안에서 RNA 집단에 선택압을 걸어 성능이 좋은 서열을 골라내는 실험이 이루어졌고, 세대를 거치며 촉매 능력이 향상되는 것이 관찰됐습니다. 자연선택은 세포가 아니라 분자 수준에서도 작동합니다.
그리고 이 RNA 조각이 앞의 원시세포 안에 들어가면, 막이 내 복제 산물을 나에게 남겨 주는 장치가 됩니다. 개체라는 단위가 생기는 순간이에요.

어디까지가 실험이고 어디부터가 가설인가 — 송쌤생명과학 자체 제작
선을 정확히 그으면
| 단계 | 실험으로 확인된 것 |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 |
|---|---|---|
| ① 단량체 | 여러 조건에서 아미노산·염기 등이 생성됨. 운석에서도 검출 | 실제 초기 지구의 대기·환경 조성 |
| ② 거대분자 | 표면·건조 조건에서 짧은 중합체 형성 | 기능을 갖춘 길이의 서열이 생기는 경로 |
| ③ 원시세포 | 막 방울의 자기조립·성장·분열, 내부 RNA 연장 | 정확한 자기 복제와 대물림 |
| ④ 자기 복제 | 리보자임의 존재, 시험관 내 RNA 선택 실험 | 처음부터 스스로를 복제하는 RNA의 기원 |
정리하면 ①과 ③은 상당히 확인됐고, ②는 원리만 보였으며, ④는 핵심 고리가 비어 있습니다. 이 표를 그대로 외우실 필요는 없지만, "생명의 기원은 다 밝혀졌다"도 "아무것도 모른다"도 둘 다 틀렸다는 감각은 가져가세요.
쌤 한마디 — 이 주제로 생기부를 쓰겠다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밀러-유리 실험으로 생명이 탄생했음이 증명되었다"고 쓰는 것. 이 한 문장이 글 전체의 신뢰를 깎습니다. 대신 이렇게 쓰세요. "밀러-유리 실험은 무기물에서 유기 단량체가 생성될 수 있음을 보였지만, 중합·구획화·자기 복제는 별개의 문제다". 실험이 보인 범위를 정확히 아는 학생은 드뭅니다. 그 정확함이 곧 차별점이에요.
정리하면
생명의 기원은 단량체 합성 → 중합 → 구획화 → 자기 복제의 네 단계로 나눠 봅니다. 밀러-유리 실험은 첫 단계가 생명 없이도 일어남을 보였을 뿐 생명을 만든 것이 아니고, 대기 조성 가정은 이후 수정됐지만 결론 자체는 여러 조건에서 재현됐습니다. 원시세포는 실험실에서 자기조립하고 자라고 갈라지며, RNA는 정보와 촉매를 겸할 수 있어 닭과 달걀 문제를 풀 후보로 꼽힙니다. 여기까지 오면 자연선택이 작동할 최소 조건이 갖춰지고, 그 뒤부터는 진화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의 연대 — 45억 년, 35억 년 — 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요. 다음 글 화석 기록과 연대측정에서 그 숫자가 나오는 방법을 직접 계산해 보겠습니다.
틀린 내용이나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문의하기로 알려 주세요. 확인한 뒤 고치고, 고친 날짜를 위에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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